새전북신문

“죽을 때까지 농사짓고, 학문으로 생활 즐기고 싶어”

‘어쩌다 농부’의 인생삼락 3/‘귀촌 롤 모델’ 차배근 서울대 명예교수

‘언론학 바이블’ 커뮤니케이션 개론 등 총 31종 출간
20년 전 귀촌… 4,000여평 농사 지으면서도 ‘수불석권’
연구서 외에 7년간 수필과 꽁트 등 연재 ‘꿀벌형 인생’

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08월 28일 14시46분

그림: 1976년부터 지금까지 저술한 단독 저서 18종 등 총 31종의 책이 거실 한 켠에 전시돼 있다. 선생님은 이 책의 인세로 땅도 사고 집도 지었다.

나의 귀촌 ‘롤 모델’은 차배근(83)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이다. 내가 가끔씩 찾아뵙는 대학교 은사이다. 선생님은 2004년 경기도 화성에 정착한 후 20년 넘게 부인 신문자(81)씨와 함께 4,000여 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언론학 관련 왕성한 저술활동을 해온 천상 ‘딸깍발이 선비’가 농부로 변신한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지금도 우리 전통 커뮤니케이션 문화 연구서를 내고, 수필과 엽편소설을 연재하는 ‘주경야독’으로 주위를 또 놀라게 하고 있다.

1973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대에서만 34년간 봉직한 선생님의 저술 성과는 ‘넘사벽’(넘볼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출간한 책은 단독저서 18종, 공저·공편 13종 등 총 31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커뮤니케이션학 개론 상·하(1976년), 사회통계방법(1977년), 사회과학연구방법(1979년) 등은 전공 필수 교재이자 언론학 ‘바이블’로 지금까지 10만부 이상 팔렸다. 관련학과 전공생들은 거의 모두 이 책으로 공부했다는 얘기다.

일찌감치 학계에서 일가를 이룬 선생님이 귀촌을 생각한 건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서울대에 부임한 선생님은 주요한 개론서와 연구결과들을 내놓으며 언론학계에서 한참 주목을 받을 때이다.

“내가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농촌에 별장을 한 채 갖고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농사도 짓고 책도 읽고 싶은 것이 젊었을 때부터 일종의 꿈이었소. 당시 연로한 부모님 산소 자리를 마련하려고 차씨 집성촌이 있는 마을 산기슭에 300여 평의 땅을 사고, 이듬해 조립식 별장을 지었지.”

서울과 화성을 오가던 선생님은 2004년 아예 전원주택을 지어 이사했다. 사모님은 귀촌이 선뜻 내키지 않았을 테지만 선생님은 ‘살살 꼬셔서’ 함께 왔다고 한다. 집 한 가운데 천장을 높이 만든 방을 서재로 꾸미고, 사모님을 위한 작업실도 만들었다. 사모님은 서울대 조소과 출신으로 그동안 개인전도 열고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해온 어엿한 작가이다.

그곳은 차씨 종친이라는 든든한 연고가 있었지만 처음에 자리잡는 건 쉽지 않았다. ‘책만 보던’ 서울대 교수님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하는 눈초리도 있을 터이고, 동네 사람들과 잘 어울릴까 하는 선입견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오며가며 차를 태워주고 모르는 농삿일에 대해서는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묻다 보니 점차 마음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참깨를 심는 시기는 아까시꽃이 필 무렵이라든가, 들깨 수확 시기는 씨방 속의 들깨 알이 검게 변했을 때라는 것 등은 동네 할머니 멘토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서울대 교수님’이 농사 좀 짓겠다고 모르는 걸 물어오는 게 시골할머니들에게는 신기하고, 속으로 으쓱한 기분이 들었을 법하다.

나중에는 옆 동네 사는 종친회장이 찾아와 고유제문을 한문으로 써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또 자기 땅을 사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다보니 4,000평에 이르렀다. 책 판매로 생긴 인세 대부분을 이때 썼다.

농사 규모가 커지면서 대형 농기계를 갖추고 이를 운전하는 자격증도 땄다. 트랙터 굴삭기 경운기 관리기 등으로 웬만한 작업은 혼자서 다 해치웠다. 땅을 개간해 밭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기 전에 땅을 갈아엎는 로터리를 치고 트랙터로 작물을 수확하는 건 기본이다.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을 만들고, 돌과 나무가 뒤엉킨 계곡도 깨끗하게 정비했다.

올해에 심은 농작물 종류만 봐도 시골의 프로농사꾼을 훨씬 넘어선다. 집 주변에 상추 쑥갓 열무 청경채 파 당근 케일 등 채소류, 오이 토마토 가지 방풍나물 도라지 더덕 옥수수 조선호박 단호박 줄콩 작두콩 고구마 고추 참깨 들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웬 작물을 그렇게 골고루 심을까 의아해 하는 제자들에게 설명이 따른다. “해마다 봄이 되면 뭘 심으면 괜찮을까 궁리하다가 이거 조금 저거 조금 하다보니 작물이 많아지더라고. 연구할 때도 여기저기 관심분야를 넓히다보니 손 댄 게 많아진 것처럼. 내 취향인가 봐. 허허”

신문학과(또는 신문방송학과)가 인기학과로 떠오르던 시기에 기본적인 연구 영역을 확립한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퇴임후에도 식지 않았다. 그야말로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수불석권(手不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서재에 들어가보니 책상 위에 ‘대동야승(大東野乘)’이 놓여있다. 조선시대 당쟁·사화·옥사 등 역사적 사건과 일상사를 기록한 야사 수필 일화 등을 모은 종합서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문화에 관하여 알고 싶고, 만약 가능하면 이 방면의 책들을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써보고 싶어.“

‘중국근대언론발달사’(2008년) ‘미국신문발달사’(2014년) ‘한국커뮤니케이션학사’(2017년) ‘우리나라 전통신문; 조선시대 조보(朝報‘연구’(2022년) 등이 퇴임 후에 쓴 책이고, 조만간 ’신문고(申聞鼓) 제도의 참모습’도 나올 예정이다. 이 중 조보 연구는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본격적인 학술서 외에도 7년전부터는 월간지 ‘춤’에 ‘낭형당 만필’과 엽편소설, 꽁트를 연재하여 2023년엔 이 글을 모아 ‘낭형당 만필-차배근 교수의 농촌일기’를 내기도 했다. 주로 우리 고전에 나오는 소재들이나 농촌생활에서 느끼는 일들을 잔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쓴 글들이다.

그림 2004년 지어 입주한 ‘언덕 위의 하얀집’ 주변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각종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정원 곳곳에는 조각가인 사모님이 버려진 농기구나 폐품을 이용해 만든 작품들이 놓여 있다.

선생님이 짓는 농사 규모는 크지만 돈벌이를 위한 건 아니다. 수확물은 주변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낼 뿐이다. 돈도 안되고 힘드는 일을 왜 하실까?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는 못 사는 성격이오. 게다가 난 친한 친구도 별로 없고, 노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내가 과거 몇 십 년 동안 해 왔던 공부나 하고, 글도 쓰면서 살게 될 뿐이지. 난 내가 심은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오. 게다가 농사일을 하면 자연히 운동도 되고...”

논어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樂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낙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농사든 연구든 귀찮고 힘들 때가 없지 않겠지만 선생님은 진정 그걸 좋아하다가 이젠 그 자체를 즐기는 경지로 접어든 듯하다.

선생님은 “몸이 예전같지 않다” “이젠 농사를 많이 줄여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크게 줄이지는 않은 듯하다. 선생님은 주민등록상으로는 83세이지만 실제로는 85세이다. 시골에서 2년 늦게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근력이나 총기는 여전해 보인다.

그림 : 선생님은 미니굴삭기와 트랙터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신다. 초창기 이런 농기계 구입에만 5,000만원을 투자했다. 월간 ‘춤’지 제공

선생님은 최근 ‘춤’지에 기고한 글에서는 은사인 이두현 전 서울대교수의 정년퇴임문집 머리말을 인용해 노년의 바람을 이렇게 말했다. “첫째, 노년의 고독 속에서 누구나 혼자 죽어가야 하는 존재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이제까지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도락(道樂)으로서의 학문으로 생활을 즐기며, 셋째로는 비록 성인군자는 못 되어도 한 사람의 선비로서 인생을 시종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나도 그래요. 그냥 교수답게, 학자답게 일생 동안 조용히 살다가 병고에 시달리지 않고 조용히 죽고 싶을 뿐이라오.”

선생님은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분류한 학자의 세 가지 유형 가운데 ‘꿀벌형’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털어놓았다. 개미형은 부지런히 학술자료를 모으지만 논문이나 책으로 만들지 못하는 학자, 거미형은 자료도 모으지 않고 마치 거미가 궁둥이로 거미줄을 줄줄 뽑아내듯 글이나 책을 마구 쓰는 학자이다. 이에 비해 꿀벌형은 개미처럼 열심히 연구자료를 모은 다음 마치 꿀벌이 꿀을 따다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물질을 합쳐서 벌꿀을 만들어 내듯이 논문이나 책을 쓰는 학자이니 가장 생산적이고 유용하지 않은가.

국내에서 신생 학문인 커뮤니케이션학(언론정보학)의 기틀을 잡고 후학을 양성하다, 이제 성실한 농부이자 수불석권(手不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의 자세를 견지하는 원로학자로서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꿀벌’의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맹자는 인생삼락 중 하나가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닮고싶은 스승에게서 인생을 배우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일 성 싶다. /최진환(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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