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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광복 80주년의 의미 살려야

이종근 문화교육부장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4월 29일 13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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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필자가 찾은 창동학교의 옛 모습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민족시인 심훈이 애타게 고대했듯, 부디 그런 날을 내다볼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바란다.





광복 80주년 맞아 전주 창동학교(昌東學校)의 위치를 찾아내다



임실 삼요정(三樂亭)은 임실지역 3·1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1921년 강제 철거됐다. 지난 2002년 10월 임실군이 김영원(金榮遠, 1853∼1919)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현재의 위치에 복원했다. 또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독립유공자 삼혁당 김영원의 일괄 자료가 보관된 곳이다. 국가보훈부는 2003년 12월 삼요정을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그는 임실군 청웅면 선거리 감나무골 시목동 선무봉 아래에 '삼요정(三樂亭)'을 건립,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는 산과 물이 수려하며, 학문을 연마하기 좋은 곳이고, 애국 정신을 고취하기 좋은 곳이라는 세 가지 뜻을 포함한 말이다.

선생은 본관 경주, 자 화경(化京), 호 삼혁당(三革堂), 도호 원암(源菴)이며, 생전에 김두희(金斗熙), 김병옥(金秉玉), 김병원(金炳遠), 김병희(金丙熙)라고 불렸다. 1919년 3ㆍ1 만세운동 당시인 ‘1919년 3월 2일 운암면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전교사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매를 전달받아, 같은 날 운암면 입석리, 선거리, 학산리 일대에 게시’한 것으로 투옥되어 옥사한 인물이며, 1991년 건국훈장(建國勳章) 애국장(愛國章)에 추서됐다.

그는 1853년에 태어나 가학을 바탕으로 과거 준비를 했으며, 1878년과 1879년에 무성서원 도내색장(道內色掌)과 도내장의(道內掌議)에 임명됐으며, 1879년 사직대제 제관으로 차정되는 등 유림으로 활동했다. 1882년 즈음 과거 시험을 단념하고 선거리 시목동에 삼요정(三樂亭)을 건립, 후학을 양성했다. 1873년경 해월 최시형의 임실포교시 동학을 처음 접했다. 1889년에 동학에 입교했으며, 삼례취회, 보은취회에, 1894년 도접주로서 백산대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동학의 패퇴한 이후 회문산에서 6년간 은거하기도 하였는데, 천도교 임실교구장, 전주 창동학교(昌東學校), 청웅 삼화학교(三和學校)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는 1904년엔 운암 출신 최승우의 지원을 받아 전주에 창동학교를 창설하고 학감 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 측량도를 보니 창동학교는 전주 객사와 북문 인근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일본어 초등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삼남(三南)학당과 자혜(慈惠)의원, 그리고 헌병대와 수비대에 소속된 말을 사육하기 위한 전주목장(牧場)과 연병장 등이 보이며, 남문에서 북문까지 이어지는 성벽이 남아있음도 확인된다.

1906년엔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649번지에 삼화학교(사마제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다. 자금은 최승우가 제공하고 김영원이 초대 교장을 맡았다. 학교 건립 추진위원으로 박준승, 최승우, 박성근, 김영원, 황희영, 한영태 등으로 이들의 면면을 주시하고 또한 우수한 학생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 하던 왜경은 이 곳을 배일사상의 온상으로 간주하고 1909년에 강제로 폐쇄했다. 그 뒤 이 곳을 천도교 347 교리 강습소로 개칭, 활용하였으며 청웅면사무소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그는 1919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선발할 때 박준승과 양한묵을 추천했다. 3.1운동 당시에는 운암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중 체포, 그 해 8월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독립유공자 삼혁당 김영원 일괄 자료는 36건으로 전적류 6건과 고문서 30건으로 구성됐다. 이는 선생의 유학자로서의 삶과 동학 접주로서 활동, 천도교 민족교육 등을 보여주는 1919년까지의 자료들이다. 선생은 25세의 나이에 무성서원 장의와 색장을 지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삼요정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박준승 선생의 제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임실교구장이던 한영태 의사가 선생의 제자다. 그의 제자 중에는 삼일만세운동 때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준승이 있다. 김영원이 없었다면 박준승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고손자인 김창식 천도교 임실 교구장은 최근 국가등록문화재인 천도교 임실교당을 임실군에 기부했다. 임실군 청웅면엔 동학과 천도교, 그리고 일제에 항거한 유적지가 즐비하다. 청웅면 향교리 605번지 성전마을엔 김개남장군의 서당, 임실군제2 천도교구가 있었다. 청웅면 구고리 647번지엔 임실군 천도교구, 청웅면 구고리 649번지엔 삼화학교, 청웅면 구고리 494-1번지는 3.1운동집결지이며, 청웅면 남산리 산29번지에 전석기 의병장의 묘가 있으며,

청웅면 옥석리 506번지 주치마을엔 박준승생가가 자리한다. 이곳은 푸른(靑) 창공을 향해 웅비(雄飛) 하고 싶은 사람들이 항상 미래를 준비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고장 '청웅(靑雄)'이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란 의미가 무엇보다도 크다. 처음으로 외세에 통치권을 빼앗긴 불행한 역사를 이겨낸 날이니 왜 그렇지 않을까. 의병전쟁으로부터 따지면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강점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인 것이 50년, 통치권을 빼앗긴 것으로 치면 36년이나 되는 항쟁의 역사다.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처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심훈, ‘그날이 오면’ 후반부, 1930)'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민족시인 심훈이 그처럼 애타게 고대했듯이, 부디 그런 날을 내다볼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바란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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