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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전주 거부 백남신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02월 24일 08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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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당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랜 한옥이며 민가 가운데 유일한 문화재다. 솟을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효자승훈랑영릉참봉수원백낙중지려(孝子承訓郞英陵參奉水原百樂中之閭)’라고 적혀있다. 고종이 백낙중의 효행을 치하해 벼슬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학인당(學忍堂)이라는 이름도 백낙중의 호 인재(忍齎)에서 따왔다. 건축주는 백인걸의 11세손 백낙중이다. 그는 장자 백남혁이 태어난 1905년에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만 2년 8개월이 걸렸다. 건축을 위해 투입된 인원은 4,280명에 달하고 공사비는 백미 8,000가마에 이르렀다.

백진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 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경복궁을 중건한 바, 이때 그도 거금을 헌납했다. 이후 대원군은 그에게 소원을 물었는데,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첫째, 당시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는 재물이 많다고 해서 큰 집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짓게 해달라는 것과 큰 집을 지을 때 궁궐 목수로 하여금 짓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둘째, 부임해오는 관리들의 환영인사는 자칫 화를 자초할 수도 있지만, 이임하는 관리들의 환송잔치는 인심도 얻고 한양에 인맥도 만들게 되므로 전라도에 임명된 관리들의 이임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셋째, 전라도의 모든 물자의 궁궐 납품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백남신(白南信, 1858~1920)은 임실군 관촌면 방수리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본관은 수원백씨이고, 전주에서 알아주는 토호의 집안 자손으로 아버지 백진수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아들이 됐다. 생부의 종제(從弟)로, 승정원 좌승지 벼슬을 하고 있었던 백현수가 단명하자, 백남신을 양자로 데려왔다고 한다. 백남신은 1909년에는 전주군민회장으로 있으면서 백성 구제에도 힘을 썼다. ‘전주 군민회장 백남신씨는 춘궁(春窮)에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작년 겨울에 부요한 회원 9명과 협의하고 농공은행(農工銀行)에서 1만5,000원을 얻어서 매 인에게 1천5백 원씩 나누어 주고 금년 봄과 여름에 시장가가 오를지라도 시가대로 아니하고 은행변과 무역한 매가만 빼기로 작정하고 그 회 총무 김우현씨도 그 아홉 사람에 들었는데, 또한 후한 뜻으로 금년에 내어 팔 때에 승(升: 되)을 후히 주어 궁민들이 큰 이익을 얻은 고로 그곳 협동공제회에서 백남신, 김우현 양씨의 은혜를 감동하여 민회와 양씨의 만세를 불렀다니 은혜 아래 어찌 그리 아니하리요’(경향신문 1909년 7월 17일자 기사 내용)

거부로 성장한 백남신은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왕실에 부채 진상품을 올렸고 사회에 여러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같은 전주의 스토리를 찾아 널리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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