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아침발걸음]고창 안터마을, 남쪽에 세워진 당산과 숲정이 의미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9월 22일 15시18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내동리, 이곳에는 ‘칠송동(七松洞)’ 혹은 ‘안터’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지금은 네 가구만이 남아 조용히 살아가는 소규모 촌락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마을은 결코 단순히 사라져가는 농촌마을의 한 풍경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이 땅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온 자리였다. 내동리 일대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수천 년 전 이곳에서 사람들이 불을 지피고 흙을 빚으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왔음을 말해준다. 비록 흩어진 토기 조각일 뿐이지만, 그 속에는 선인들의 섦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안터마을은 영산기맥의 문수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골에 터를 잡았다. 남쪽에는 물길이 만든 넓은 범람원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고수천이 흘러 비옥한 충적지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 땅에 논을 일구고, 구릉에는 밭을 일궈 곡식을 길러냈다. 집들은 대부분 남향과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햇볕과 바람을 고르게 받도록 했다. 그러나 안터에 들어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짜 마을의 중심은 집이나 논밭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든 곳은 따로 있다. 바로 마을 남쪽 언덕에 선 당산과 숲정이였다.

전통적으로 우리 마을들은 북쪽의 낮은 언덕을 막거나, 서쪽 물길의 빠져나감을 보완하기 위해 숲과 당산을 세웠다. 그런데 안터마을은 달랐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남쪽 언덕에 당산과 숲정이를 두었다. 얼핏 풍수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활의 지혜가 숨어 있다. 마을 남쪽 앞에는 고수저수지가 자리하고, 그 너머 두평리로 이어지는 깊은 협곡이 뻗어 있다. 낮에는 골바람이 계곡을 따라 불어오고, 밤이면 산바람이 차갑게 내려 앉았다. 골바람은 들판의 기온을 흔들어 농작물에 냉해를 주었고, 서리는 생명의 맥을 끊어놓기도 했다. 매일같이 불어오는 바람에 사람들은 결국 마을 앞 남쪽 언덕에 숲을 조성했다. 당산과 숲정이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려는 오만이 아니다. 자연의 힘 앞에서 몸을 낮추고 공존을 선택한 주민들의 지혜였다.

지금도 안터의 숲정이에는 거대한 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있다. 서어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가 3미터를 훌쩍 넘고, 느티나무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다. 세월의 무게를 껴안고 묵묵히 서 있는 이 나무들은 단순히 오래된 수목이 아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목(神木)이었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제의의 중심이었다. 정월이면 온 마을이 이 나무 앞에 모여 제를 올렸고, 사람들은 풍년과 평안을 빌며 서로의 마음을 모았다. 당산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한때 마을을 두텁게 둘러싸던 북서쪽의 숲은 대부분 개간되어 사라지고, 남쪽의 숲정이와 당산목 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라고 해서 그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멸 위기에 놓인 이 작은 공동체가 지금까지 당산을 지키고 있다.

안터마을 당산은 단순히 바람을 막는 방풍림의 숲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위협 앞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방어막이자,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세운 상징물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겸손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당산목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은 단순한 생물학적 흔적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맺어온 긴 대화의 기록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개발과 효율의 이름으로 숱한 마을 숲과 당산을 잃고 있다. 그러나 안터마을의 당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무 아래서 드리운 그늘은 단순한 시원함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온 공동체의 기억이며, 자연과 공존하려 했던 오래된 약속이다.

고창 안터마을의 남쪽에 조성된 숲정이와 당산은 풍수적 장치이자 민속 신앙의 상징이며,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품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미세한 기후조차 느끼며 함께 살아간 지역 주민의 지혜가 담긴 결과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곳에 왜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지, 그 당연함이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이병렬(고창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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