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북, 근대의 자취] <5>신태인도정공장(하)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3.09.02 13:58

도정공장의 생산물은 백미와 부산물로 구분한다. 백미는 도정과정의 최종 생산품이고 부산물은 그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벼가 덜 여문 설미와 낱알이 부서진 쇄미(싸래기), 낱알이 작은 백세미 등이 부산물로 남는다. 도정과정에서 발생한 미강은 미강유나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됐다. 가장 먼저 발생하는 왕겨는 함평이나 무안 등지의 양파밭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들어와 쌀겨를 훔쳐갔다. 근무자들은 배고픈 밤손님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오죽하면 쌀겨를 다 훔치러 왔을까 하는 인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시절 신태인도정공장에는 현미기 10대와 백미기 15대가 설치돼 있었다. 공장에는 200마력짜리 메인모터를 비롯한 20여 대의 모터가 가동됐다. 도정공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이 신태인 읍내의 전체 사용량을 웃돌았다. 메인모터의 피대(동력을 연결하는 띠)는 사람이 누워서 잘 정도로 크고 넓었다. “도정공장은 거칠고 위험한 작업장이었어요. 도정공장의 일꾼들은 언제라도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도구를 들고 일합니다. 원료간에서는 갈고리, 검사장에서는 삿대(긴 홈이 파인 쌀 검사기구)를 써요. 공장 내부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피대가 돌아갑니다. 밤새워 공장을 돌릴 때 새벽에 사무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걸어서 갔소, 누워서 갔소’하고 물어봅니다. 그 시각의 연락이라면 사고가 분명하니까 경상이나 중상이냐 정도를 그렇게 물었지요. ” 매가리간(정미소) 3년이면 벙어리도 말을 한다고 할 정도로 험한 도정공장 시절을 박종영씨는 머리 흔들며 잊고 싶어했다. 신태인도정공장이 폐업한 것은 전국에 농협 미곡처리장이 생기면서 예고된 일이었다. 정부가 양특적자를 줄이기 위해 농협에 양곡가공업을 권장하면서 민간 도정공장의 일감이 눈에 띄게 줄었다. 거친 일터와 정부의 대책 없는 정책전환에 염증을 느낀 박종영씨는 1997년 도정공장을 폐업했다. 부친 박용기씨(1919∼1999)에게 물려받은 가업이며 그 자신 청춘을 바친 현장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잡초가 수북이 자란 공장마당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미증유의 공간과 마주친다. 목을 완전히 젖혀야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천정은 양철지붕 그대로다. 안에서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도 비가 새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바닥과 양철지붕 사이를 수많은 목재 구조물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도정공장의 내부 구조물이 목재로 된 것은 왕겨나 쌀겨의 파괴력 때문이다. 모터의 압력에 의해 공장 안을 떠다니는 쌀겨는 쇠를 급속하게 갉아먹는다. 쇠는 그 견디는 힘이 나무만 못할 뿐만 아니라 철거나 설치도 복잡하여 아예 목재를 사용했다. 공장에는 전용 목수가 있어 날마다 구조물을 만들어댔다. 심지어 원료나 현미, 백미를 실어나르는 승강기도 목재로 되어 있다. 폐업 6년째를 맞은 공장은 고철상에 팔린 철제 기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예전 모습 그대로다. 현미기와 정미기를 설치했던 콘크리트 받침이며 목재 도구들, 동력을 공급해준 모터에 거미줄과 먼지가 두텁게 뒤엉켜있다. 바닥에는 아직도 쌀겨가 푹신하게 깔려있다. 벽체는 흙과 짚을 섞어 뭉개어 마른 대나무로 엮은 지주대에 붙여 완성하고 겉면에 회를 발랐다. 창고쪽 벽면의 절반 정도는 다시 목재를 가로로 붙였다. 쌀가마니의 무게와 마찰을 의식한 조처다. 사람이 철수한 이 공간에 박쥐와 족제비 고양이와 구렁이까지 무시로 드나든다. 먹이가 되는 쌀겨와 아무도 찾지 않는 음습한 공간은 은신처를 찾는 음지동물을 마음껏 유인하고 있다. 공장 밖으로 나오면 눈길을 끄는 것이 대형 굴뚝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굴뚝의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일본의 인테리어 업자가 찾아와 사겠다는 의향을 밝혔었다. 1920년대 구운 적벽돌은 일본에서도 귀하다며 한 장 당 1천엔씩 사겠다고 제의해왔으나 박종영씨의 거절했다. 도정공장의 부속건물이었던 길가 변 상가도 1920년대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길 건너편(읍사무소 앞)의 오까베(일본식 목조건물)와 정목의 집은 1970년대 헐어냈다. 그 뒤편의 도정공장 창고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견고한 돌로 주춧돌을 쌓고 적벽돌로 몸체를 세우고 콘크리트 기와로 지붕을 덮은 창고의 한쪽 면은 담쟁이넝쿨로 뒤덮여 고풍을 더해준다. 도정공장의 사무실에는 농장주 정목의 손때 묻은 금고가 유일하게 남아있다. ‘saluri osaka'라는 라벨이 선명한 금고의 문을 열면 다시 나전칠기로 고급스럽게 장식한 속문이 있다. 신태인읍과 정읍시는 용케 남아있는 신태인도정공장을 농업사박물관과 근대농업체험관으로 활용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신태인읍 박용만 총무계장은 “올해 소도읍 선정심사에서 아쉽게 탈락했지만 다시 응모하여 도정공장 등 일제하 근대농업의 유산이 풍부한 신태인을 근대농업의 관광도시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고 소망했다. 70∼80년대 도정공장 앞에는 4개나 되는 요정이 성업하였다. 연간 40만 석의 미곡이 들고 나며, 종업원이 300명에 달하는 경제력의 여파였다. 신태인 생장의 주역이었고 온몸으로 쇠락을 함께 하고 있는 도정공장이 다시 신태인의 희망이 되어줄지 기로에 서 있다./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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