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천(雙泉) 이영춘 박사는 국내 보건의료 선구자로 잘 알려졌다. 일제 수탈사의 생채기까지 어루만진 큰 스승으로도 칭송받는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살리는 두 개의 샘이란 뜻을 지닌 아호처럼 말이다.

이 박사가 떠난지 35년. 그가 애지중지 가꿨다는 정원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의 흔적을 뒤쫓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봤다. 지난 주말 찾아간 군산시 개정동 이 박사 가옥(전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00호)은 아름드리 정원수로 뒤덮여 있었다.

10여년 전 첫 방문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전 이 박사가 전지가위를 들던 때보단 잡풀도 많고 고사목도 적지않았다. 한 동네에서 살아온 이종예씨(66·한국문화관광해설사회 중앙회 이사)의 기억을 빌려보면 그렇다.

이 박사는 젊은시절 한 손에는 의료봉사용 왕진가방을, 또다른 한 손에는 전지가위를 들 정도로 정원 가꾸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왕진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논밭두렁을 달리다가도 틈나는대로 정원을 직접 손질했다는 얘기다.

“나무를 무척 좋아했다. 어딜가나 좋은 나무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집 안 정원은 물론이거니와 개정병원(현 군산간호대학) 주변까지 꽃과 나무를 직접 심고 가꿔올 정도였다.” 이종예씨의 기억 속에는 의료인이자, 정원사(?)였던 이 박사와의 색다른 추억이 또렷했다.

현재 그의 정원에는 수십년 된 모과나무부터 사오백년 됨직한 느티나무까지 가지가지 수목이 뿌리내렸다. 봄에는 샛노란 황매화가 화사하게 피고 가을에는 매혹적인 목서꽃 향이 온동네에 퍼진다고 한다. 흔히 만리향(금목서)과 천리향(은목서)으로 불리는 목서나무는 당초 두 그루였는데 금목서는 고사했다고 한다.

또, 수문장마냥 대문 앞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삼백년을 더 산 것으로 보였다. 허리춤 둘레를 재보니 3m가 넘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은행나무는 암수 두 그루가 있는데, 이 박사는 가을에 익은 은행을 화롯불에 구워먹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날 생기잃은 정원수 한 그루를 무심코 베려던 아들을 본 이 박사는 크게 호통치고 집밖으로 내쫓아버리기도 했다.” 몇 해 전 고인이 된 아들이 임종 전 이종예씨에게 귀띔한 이 박사와 정원수에 얽힌 일화다. 사람을 사랑한만큼 자연도 사랑했다는 얘기다.

사실, 이 집의 원주인은 따로있다. 바로, 일제 강점기 국내 최대 대지주이자 수탈사의 상징처럼 여겨져온 구마모토 리헤이. 구마모토는 1920년께 이 집을 지어 별장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 여의도 40배에 달하는 논밭과 소작농 2만여명을 거느린 자신의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덩달아 국내 첫 포장도로이자 수탈길로 불려온 일명, 전군가도(국도26호 전주~군산 번영로)도 집 앞으로 뚫렸다.

당시 이 집은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시공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겉모습은 유럽식, 실내는 일식 다다미 거실과 한식 온돌방 등을 뒤섞은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국내에선 최초로 미터(ｍ)법을 적용해 지은 건축물이기도 하다.

대부호이자 수집광이었던 구마모토는 건축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관저보다 더 멋지게 지으려고 경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건축비도 그만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거실에는 고종이 쓰던 가죽 의자부터 영국 왕실박물관에서 사들인 그림까지 온갖 골동품이 장식됐다.